*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 평가, 감상은 각자 모두의 것이며 저는 모두 존중합니다. 여러분도 저의 의견을 존중해주세요.
*모든 창작물을 만드는 이들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어떤 감정도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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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고등학생이 이세계로 가 마왕을 쓰러트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다 못 해 징그럽다. 우리의 후손들이 먼 미래에 문학을 공부한다면, 이러한 플롯이 하나의 사조였다고 기억할 정도로. 어떤 장르가 지겨울 정도로 뻔한 리듬이라면 작가들은 그 리듬을 변주하기 시작한다. 어떤 용사는 마왕과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어떤 용사는 마왕과 손을 잡는다. 또 어떤 용사는 아예 마왕과 손을 잡기까지 한다.
그런데 여기에 평범하게 마왕을 죽이고 돌아온 한 소년이 있다. 그는 겁쟁이에 울보였지만, 선한 마음을 가졌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곳도 아닌 이세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 그런 그는 속으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바란다. 아주 소소한 보상. 조금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 소망. 그게 뭐가 나쁠까. 성인도 되지 못 한 아이가 한 세계를 구하고 돌아왔다. 남들보다 조금 행복할 권리 정도는 있지 않을까?
잔인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 했다. 8개월 후에 돌아온 세상은 김민수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괴롭혔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친척들은 그를 불효 쓰레기 취급한다. 친구들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 남은 건 이세계를 다녀왔다는 증표처럼 남겨진 능력뿐. 세상은 용사인 그를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무언가 잘못된 세계, 소년은 이 슬픔을 모두에게 가르쳐주기로 결심한다.

웹소설, 웹툰이 지양하는 바가 과거의 만화와 달라졌다. 당연하다. 만화책은 '책'으로 보는 것이고 웹툰은 '핸드폰'으로 보는 것이니까. 더더욱 가벼워지는 것이다. 혹자는 이 점을 K-웹툰이 미국 코믹스와 일본 망가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지는 부분으로 지적하지만, 글쎄, 나는 생각이 다르다. 재즈를 누르고 등장한 락은 양아치 음악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었다. 일렉과 락을 차용한 재즈 아티스트들을 상업화되었다고 비판한 평론가들도 있었다. 예술 장르가 대중친화적으로 기울어가며 발전하는 것은 숙명이다. 애초에 지금 그들이 예술성이라고 부르짖는 기존의 만화조차 과거의 pop이었다.
그러면 웹툰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독자들의 우월감과 감정적 대리만족을 지향하고 있다. 시쳇말로 사이다라고 불리는 것들이 팔리는 기조이다. 1화의 김민수의 슬픔과 분노에 가슴 깊히 공감한 독자들은 겨우 몇 컷 후에 세상에 스케일있게 복수하는 모습을 봐버렸다. 이는 엄청난 유인요소이다. 1화의 베스트 댓글이 '나같아도 날려버리겠다'였으니까. 하지만 이는 역으로 커다란 단점이 되버렸다. 아무도 진주인공의 사연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어딘가 가츠를 닮은 이 친구, 가츠처럼 사정이 딱하다. 김민수로 인해 여동생과 가족들이 죽어버렸다. 하지만 독자들은 관심이 없다. 2화에서 여동생은 위험 상황에서 겨우 곰인형을 구해달라고 한다고 울어버린다. 어딘지 모르게 철 없어 보이는, 그저 외형만 조금 귀여운 이 어린 동생이 죽어서 '잔인'하다고는 느낀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하나도 안타깝지 않다. 오히려 그 와중에 김민수의 세상에 대한 복수심이 딱해진다. 얼마나 슬펐고 화가 났으면 이런 어린 아이마저 죽였을까.
이는 철저히 미스이다. 우린 이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복수가 김민수의 복수를 막는 걸림돌처럼 느껴져버리면, 우린 이 소년의 복수가 사이다로 느껴지는 게 아니고 고구마로 느껴진다. 실제로 초반 독자들은 김민수가 박정수를 이기기를 희망하는 댓글, 진짜 주인공을 돌려달라는 댓글로 가득했다.

그러나 작가는 전반적으로 인물들을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심지어 몇 화 등장하다가 죽어버리는 해군들마저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를 집대성하듯 등장하는 진정한 흑막, 이성준은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회귀하고 루프하면서 정신이 나가버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인류의 미래를 저당잡고 나아가지 못 하게 만든다는 고뇌를 한다. 독자들은 또 다시 새로운 인물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이번에도 박정수는 매력에 있어서 뒷전에 물러나버린다...)
그는 인류의 미래와 자신의 안식을 위하여 계획을 꾸몄다. 이에 따르는 희생도 있었지만, 그는 용서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에 속죄라도 하려는 듯, 김민수에게 맞서 한쪽 팔이라도 잘려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는 이성준에게 함부로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어려워진다.
근데 그런 이성준이 도대체 왜 저 장면에서 김민수를 도발하는가
이는 작가의 연출적 편의를 위해서 넣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진짜 흑막은 따로 있다라는 모습을 임팩트 있게 연출하기 위한 장면이다. 저 장면으로 인하여 이성준이 김민수의 부모님을 죽이면서 우는 장면이 빛바래져버린다. 결국 억겁의 시간에 의해 죄책감조차 없어진 모습. 그 모습은 마지막 이성준이 자신의 책무를 다 하려는 모습과 엮이며 모순이 되버린다. 차라리 저기서 저런 싸이코같은 모습이 아니라 참회라도 하는 듯이 고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앞뒤가 맞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캐리하는 것은 캐릭터들이다.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의 역할을 한다. 작중에서 잘 드러난 파트는 정의호 편이다. 정의호는 단순히 힘에 취해있는 바보돼지 캐릭터라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그럴만한 인간적인 사연이 있었다. 독자들이 그를 동정하거나 응원해주지는 못 하겠지만, 그를 기억하게 될 정도의 아주 강력한 충격이었다.
주인공 파티를 제외한 모든 조연, 엑스트라까지 매력이 넘쳐다보니 상대적으로 주인공이 덜 매력적이라도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실제로 1화의 충격적인 모습과 이성준의 회귀에 대한 반전 사이를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힘은 각 용사들의 사연과 캐릭터성이다.
살아있는게 기적인 상태에서도 일어나 누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안지원, 인간성에 대한 역설을 보여준 마리 스티븐슨, 평화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아이반 푸쉬킨 등... 사소한 설정 오류나 개연성 부족도 눈 감고 넘어갈 줄 만큼 매력적이고 와닿는 조연들이 가득하다.

세계관과 설정은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쁘지 않다. 각각의 성향을 가진 이세계를 두어 다채로움을 확보했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용사'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다양성을 확보하고 전투 장면의 스타일리쉬함을 확보했다. 무협지, 마법 소녀, 엑소시스트, 전대물같은 여러가지 요소가 섞여있다보니 그 맛이 매우 다채롭다.
실제 역사 인물들을 엮어 '용사'라는 설정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유치함과 가벼움을 무겁게 바꾼 점도 흥미롭다. 단순히 믿음의 용사라고 해서는 중세 판타지의 교주, 사이비 이미지를 탈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믿음의 용사에 나치즘을 섞어버리니 훨씬 인본적이고 공포가 와닿게 된다.
다만 세계관의 조금 더 구분이 확연하거나 세계를 구별하는 무언가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창의 용사와 검의 용사는 장르적 차별성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해룡의 용사와 골렘의 용사 역시 같은 중세 판타지에서 뿌리가 뻗어나다보니 개성이 약하게 느껴진다. 또한 전대 용사들이 현세 용사들과 세계가 겹치어, 이세계가 유한해보인다는 부분도 독자의 상상의 즐거움에 족쇄가 되버린다. 물론 덕분에 믿음의 용사 vs 믿음의 용사나 개조의 용사 vs 개조의 용사같은 명장면은 유한한 세계이기에 나올 수 있는 장면이었기에 이는 호불호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용사가 돌아왔다는 작중의 암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꽤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이는 파괴적인 몰입감을 가진 1화의 공이 가장 크지만, 더 나아가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과 신선함도 크게 한 몫한다. 결국 작품의 분위기야 어쨌든 재밌는 만화가 상업적인 만화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셈이다.
결말 부분을 생각해볼까? 김민수와 이성준, 박정수는 모두 용사 시스템의 피해자이다. 아니 셋 뿐 아니라 대부분의 용사가 시스템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 용사 시스템은 마왕이 생기지 않는 현실세계에서 자기들 편한대로 용사들을 징집한 후 아무런 생각없이 방치하듯 원래 세계로 돌려준다. 이구조적인 문제를 가만히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다 끝나버린다? 무언가 찜찜하다. 결국 칼과 창은 서로에 대한 자웅을 겨루다 이 시스템의 원흉에 칼,창을 돌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한 가지 순수한 의문이 생긴다. 작중의 묘사로 보아 이세계는 수는 명확히 정해져있다. 그 이야기인즉 이전의 회귀의 용사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믿음의 용사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능력에 있어 세부 사항은 달라도 대전제는 똑같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회귀의 세계에서 돌아온 전대 용사 역시 똑같은 회귀의 절차를 밟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 등장인물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현실세계에선 마왕의 등장조차도 처음이다. 이전의 회귀 용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문득 해당 세계의 마왕은 해당 세계의 컨셉과 맞물린다는 점이 생각났다. 창의 용사의 세계에선 마왕이 창잡이였다. 해룡의 세계에선 바다괴물이었고, 퇴마의 세계에선 뱀파이어였다. 그렇다면 회귀가 컨셉인 세게에서의 마왕도 회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자. 용사가 해당 세계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되는 존재라면, 굳이 어렵게 이세계의 인간을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용사의 조건은 '이세계 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다르다. 마왕은 해당 세계에 속한 존재이다. 이는 현실 세계의 마왕이 현실 세계에 살았던 김민수라는 점에서 증명된다. 즉, 마왕이 생기니 용사가 생기는거지. 용사가 생기니 마왕이 생긴게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모든 차원은 용사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고, 그 말인 즉 어떤 세계도 마왕을 막을 방법이 없다. 만약 회귀의 마왕이 바라는 세계가 누구도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존재가 계속 회귀하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면?
그렇다면 최종 보스는 회귀의 마왕이 될 것이다.
아님 말고.